Serotonin Paper

세로토닌의 생각 조각들과 기록들 (2007 - 2012)

원불교 개교의 동기와 개교표어에 대한 짧은 생각.

by 세로토닌 | 2011년 4월 8일 02:26
조회 3017 댓글 0
개교표어 :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

개교의 동기 
현하 과학의 문명이 발달됨에 따라 물질을 사용하여야 할 사람의 정신은 점점 쇠약하고, 사람이 사용하여야 할 물질의 세력은 날로 융성하여, 쇠약한 그 정신을 항복받아 물질의 지배를 받게 하므로, 모든 사람이 도리어 저 물질의 노예 생활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그 생활에 어찌 파란 고해(波瀾苦海)가 없으리요.
그러므로 진리적 종교의 신앙과 사실적 도덕의 훈련으로써 정신의 세력을 확장하고, 물질의 세력을 항복 받아, 파란 고해의 일체 생령을 광대무량한 낙원(樂園)으로 인도하려 함이 그 동기니라.




작년에 여름훈련 갔을 때 한번 읽고, 저번에 원대연 미터에서 한번 다같이 생각해보고 오늘 또 서원회 법회에서 읽은 구절.
오늘 교무님의 말씀으로는 "물질의 개벽"이 뜻하는 바가 다음과 같다고 하셨다.
1) 개화기 신문물 (무기, 열차, 전기 등) 등 물질의 개벽을 일컬음
2) 소태산 대종사가 인간이 기계와 뗄레야 뗄 수 없는 삶을 살고 있는 지금의 앞날을 내다보심

 이런 부분들에서 여러가지 관점이 있을 수 있고, 원불교에서도, 교도들도 우리는 '공부하고 탐구하는 종교' 라 하였다. 음.. 그러니 검색으로 혹시라도 이 글을 보게 되실 교도분들께서도 부디 너그러이 읽어주셨으면 한다. 
 사실 나는 지금까지 다른 친구들 혹은 교무님 등이 이 부분을 설명하실 때 항상 불만스러운 부분이 있었다.

 어떤 물질의 세력이 어떻게, 왜 융성하여 사람을 항복시키고 지배하는가?

나에게는 항상 이 부분을 설명할 때 '핸드폰'이 등장했었다. 우리는 핸드폰으로 연락을 하고 정보를 얻으며 이득을 취하지만, 반면에 그가 주는 여러가지 흥밋거리 때문에 다른 것에 집중하지 못하고 매달려 있는 경우가 많이 있다고 말이다. 핸드폰이 없던 시절에는 비슷한 이유로 아마 텔레비전 혹은 라디오였을 것이다. 차는 조금의 이득을 주지만 환경을 해치고 사람을 게으르게 한다 했을 것이고, 전화는 멀리 있는 친지를 보러 가기 게으르게 만들고 편지의 깊이와 비견이 안 되며 사람의 친밀한 대화를 해친다 했을지 모른다. 끝이 없다. 조선 조정에서는 박지원이 청나라에 갔다가 수레를 보고 이것을 도입하자 하였을 때 조선에는 길이 없어 수레를 못 쓴다고 하였다. 그 어떤 새로운 문물도 처음 도입되었을 때에는 욕을 먹고 그것에 의존하는 것은 천대받았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새로운 것이 나오고 더 좋아지면 우리가 잠시 그것들을 이용해 편리를 취했다는 것조차 잊어버린다.

핸드폰에 의존해서 사는 것이 왜 나쁜가? 나는 묻는다.
 그렇다면 정신은 핸드폰 중독자만 개벽하면 되는가?
 사람들은 핸드폰을 손에서 뗄 수가 없고, 한시도 그것을 꺼놓지 못하게 되었다. 내가 원불교 모임에 나가서 핸드폰 중독이 심각하니 물질이 개벽된 것이고 이것에 중독되지 않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지만, 그들 모두가 핸드폰을 가지고 있었고, 아무도 핸드폰을 없애고 싶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으며, 아무도 자기가 중독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면 우리의 물질 개벽 논의는 대체 누구를, 무엇을 위한 것인가? 


한번은 한국 기업이 마다가스카르와 조약을 맺고 그곳의 캐지 않은 광산을 캐고 적당한 권리를 나누어 가진다는 이야기를 뉴스에서 하는 것을 보았다. 물론 내가 쓰는 핸드폰에도 저기에서든 어디서든 광산이 있는 곳에서 캐야 하는 희귀 금속들이 많이 들어있으리라. 그런 것 뿐만 아니라, 커다란 시추선으로 지구의 지반에 구멍을 뚫어 석유와 가스를 캐낸다.

나의 생각은 이렇다. 당장 우리 손에 들린 핸드폰이 무슨 죄인가?
(게다가 삼성이 핸드폰을 팔아 원불교를 후원하고 있다는 구조까지 생각할 수 있다.)
인간이 도구에 의존해서 세상의 주인이 된 것 마냥 행동하는 것,
그로 인해 분수와 주제를 모르게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진정한 의미의, 물질이 인간을 노예로 삼는 것이 아닐까?

인간이 이렇게 지구를 해치고 생명을 죽이는 것은 어느 개벽된 정신으로 하는 것인가?
 이를테면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이야기인 고기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물질이 개벽되기 전에, 우리가 손 한번 안 쓰고 전기톱에 닭의 목을 쓱 갈아내는 것이 가능했는가? 사람의 눈이 안 닿는 곳에 아스팔트와 철근으로 돼지우리를 만들고, 돼지들을 집어넣은 뒤 돼지가 그 좁은 곳에서 움직이지도 못하고, 한번 제대로 뛰어보지도 못하고 다 크면 데리고 나가서 전기충격으로 죽인 뒤 고기로 만든다. 인간의 농경은 미국의 광활한 평야와 중국 등 여러 나라에서 엄청난 규모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런데 약 30%, 그리고 미국에서만도 70%가 가축의 사료로 쓰이고 있다. 인간은 원하는 식물만 키우고 농약과 제초제 사용으로 생태계의 다른 동식물을 죽일 뿐만 아니라, 동물을 인간의 기호에 따라서 선택하고 키우거나 먹거나 이용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의 농업이 발달하여 인간이 먹고도 남을 수 있는 양의 곡물을 생산해 내는 덕분이다.
이것은 우리의 광고와 이미지 산업이 발달하여 그것으로 돼지고기와 닭고기가 먹기 좋고 아름답다고 인식시킨 덕분이다.
이것은 우리의 교통이 발달하여 먼 곳에서 안 보이게 잡은 동물 시체를 빠르게 유통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의 기계 산업이 발달하여 그것으로 발버둥치는 닭의 목을 간단하게 자르고 죽일 수 있도록 한 덕분이다.
이것은 우리의 냉동포장 산업이 발달하여 그것으로 동물의 시체를 신선하고 깨끗한 붉은 고기로 판 덕분이다.
이것은 우리의 자본주의가 발달하여 돈만 있으면 어떤 노동과 어떤 재화도 쉽게 살 수 있게 된 덕분이다.
이것이 물질의 개벽이 아니면 무엇인가?

예전 같으면 정이 들어서, 죽이는 것도 끔찍해서 자주 먹을 수도 없었던 닭, 돼지와 소를
우리가 하루가 멀다하고 매일 술과 함께 밥과 함께 먹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의 마음이 간사하여 자기 가족과 애완동물 죽는 것은 끔찍한 일로 여기면서
먼 곳에서 자신의 밥상을 위해 죽은 수많은 돼지에 대해서는 한 점의 슬픔도 갖지 못하는가?

왜 많은 이들은 구제역으로 인간에 의해 300여만 마리의 돼지와 소가 생매장당함에 인간으로서 괴롭지 않아 하는가?
이 일이 벌어진 것이 인간이 먹을 고기를 만들기 위한 비인간적인 공장식 축산이며
우리가 지금도 먹고 있는 고기도 저렇게 만들어졌다는 생각을 왜 못하는가?

외려 고기로 먹을 것을 못 먹어서 안타깝고 침출수를 비료로 쓸 수 있다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차가 없고 거대한 포크레인이 없었다면, 조금이라도 끔찍해 하는 사람이 있더라면 그런 잔인한 사태는 없었을 것이다.
이것이 인간이 물질의 노예가 되어 눈이 먼 것이 아니면 무엇인가?

원불교의 계율로서 연고 없는 고기는 먹지 말라고 한 것을 교도들 스스로부터가 자각이 없이,
오히려 행사 때마다 성대한 잔치를 위하여 고기가 없는 곳이 없으니 마치 축산업의 부흥을 위하는 것과 같고
이것이야말로 개교의 동기에 어긋나고 인간으로서 물질에 현혹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연고 없는 살육은 금지하면서 밥상을 위해 죽지 않아도 되는 생명이 죽는 것은 왜 방조하는가?
조금만 생각해보면, 우리가 먹는 생명은 짧은 시야로 보면 우리 이웃의 배를 불리고 서로 행복해질지도 모르나
우리의 지구와 세상 속에서 생각해 보면 지구를 해치는 지속불가능한 산업이라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글이 아주 용두사미가 따로 없다. 처음 시작은 창대했으나 그 끝은 채식인 것인가...-_-;;


개교의 동기 두번째 문단에서  
2) 물질을 제압하기 위하여 정신의 세력은 어디까지, 어떻게 확장되어야 하는가?
에 대해서도 말하고 싶은데 아직은 내공이 부족하니 입을 닫고..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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