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째 발목잡힌 북한 인권법
by 세로토닌 | 2011년 4월 14일 00:24
조회 870 댓글 0
|
“대한민국 사람으로 태어난 사람들이 얼마나 부러운지 아십니까? 사람으로 태어나 굶어 죽고 맞아 죽고...그렇게 죽는 것도 원통한데 이름없이 재로 뿌려져 간데없이 사라지고...얼마나 무섭고 억울한지...”
우울증을 앓아보지 않은 이들은 우울증 환자들이 ‘힘들다’ ‘죽고 싶다’고 하는 것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한다. 때로는 ‘마음먹기에 달린 일이 아니냐’며 ‘부정적으로만 생각하니 더 그런 것’이라고 충고한다.
같은 사회에서 나고 자란, 마음이 아픈 사람들조차 우리는 온전히 끌어안지 못한다. 그들의 고통을 짐작하지만, 나의 상식과 세상의 논리로는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탓이다.
북한 인권을 말하는 목소리에 대한 우리 사회의 태도는 우울증 환자를 대하는 것과 같을는지도 모른다. 주위의 사람들이 처음에는 노력하고 힘을 북돋워주다가 반복되는 증상에 지치고 종내에는 짜증을 내기도 하고 회피하려고도 하는 일련의 과정이 재현되는 것이다.
고난의 행군 이후 북한의 아사자(餓死者)가 300만명에 육박했다는 보도에 안타까워하던 시선들은 한국 사회에서 탈북자의 수가 증가하면서 미묘하게 변했다. 체제의 우월성 혹은 우리 내부의 자만심 때문이었을까. ‘베푼다’는 식의 대북정책을 세워놓고 북한이 변하지 않는다고 윽박질렀다가, 이제는 체념하고 받아들이자는 목소리까지 나오고 있다.
![]() |
◇ 지난 2009년 탈북시도 10년만에 남한 땅을 밟은 강모씨는 교화소 시절의 삶을 떠올리며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데일리안 박항구 기자 |
헌법상 대한민국의 영토임에도, ‘인권선진국’의 양심도 외면하는 북한의 인권에 대해 가슴으로 이해하고 치열한 성찰도 없는 게 현실이다. 탈북자들이 겪었던, 그리고 지금도 북한 주민들이 겪고 있을 상황을 모르는 우리가 그들에게 ‘민주화 혁명을 하지 왜 가만있느냐’고 묻는 것은 보릿고개를 모르는 아이들이 “밥이 없으면 햄버거를 먹지 그러느냐”고 되묻는 것과 같은 것이다.
여기, “죽고싶다”고 생각하는 한 여자가 있다. 살아있다는 것에 감사하다가도 문득 살아있는 것이 죄스러워 울었다가, 그리고 이내 이를 악물고 “살아내자”는 다짐을 매일같이 하는 그녀는 탈북자이자, 도산지옥(刀山地獄)과도 같은 교화소의 ‘생존자’다.
강기옥 씨(45·가명)는 2번의 탈북과 1번의 강제 북송, 교화소에서의 지옥같던 시간을 견뎌 1999년 처음 탈북을 시도한지 10년 만에 한국 땅을 밟았다.
강 씨는 인터뷰를 하면서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얼굴이 나가면 안 되는데...” 그러면서도 그녀는 다시 물었다. “동생들이 찾을까봐 이름도 안 바꿨는데 이름이라도 본명으로 나가면...안 되겠죠?”
‘희망’이 무엇인지 2년 전에야 알았다는 그녀는 “대한민국 사람으로 태어난 사람들이 너무 부럽다”고 말했다. “대한민국이 고맙다”고도 했다. 그러나 동시에 “같은 민족이라고 하면서 정작 북한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것에 관심이 적은 것 같아 서운하기도 하다”고 털어놓았다.
강씨는 북한에서 ‘고학력 전문직’ 여성이었다. 결혼 후 일을 관뒀지만, 대학에서 해양학을 전공하고, 우리의 연구원에 해당하는 일을 했다. 친정과 시댁 부모님 모두 지역 당원으로 출신성분도 좋았다. 남편도 선박 설계를 했었다. 한번도 ‘북한에서 태어난 것’을 후회해 본 적이 없던 나날들이었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 고난의 행군 시기는 그녀의 삶을 바꿔놓았다.
식량배급이 끊기고, 남편이 간염에 걸리고, 그녀도 파라티푸스에 걸려 생계가 막막해졌다. 아픈 몸을 이끌고 자신보다 더 상태가 좋지 않은 남편의 약값을 대기 위해 처음으로 품을 팔고 당국의 감시를 피해 장사를 시작했다. 조개와 생선, 채소를 근근히 파는 행상이었다. 거리로 나섰어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곡기를 구경하지 못한 친정 부모님과 시아버지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세상을 떴다. 도움을 줄 친척을 찾아가면 희멀건 얼굴로 나와 맞았다. 모두가 똑같이 배를 곯고, 너무 오래 곯아 ‘배고픈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맏딸이라고 부모님이 아주 알뜰하게 살림살이 해주셨습니다. 먹고 사려니 별 수 있습니까. 이불에 옷가지까지 다 팔았지요.”
고민 끝에 ‘한 철이라도 날 수 있는 돈을 벌어보자’는 생각에 중국행을 택했던 강씨는 “좋은 곳에일자리 준다더니 중국 사람들에게 팔아버렸다”고 말했다.
강 씨는 중국 길림성에서도 한참을 들어가는 ‘시골’에 팔려간 뒤 고된 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그나마 그녀는 “험한 꼴 당하는 여자들 여럿 봤다”며 “그나마 나는 운이 좋았다”고 했다. 도망을 갈까봐화장실갈 때도 사람이 붙었다. 밭을 매고 있노라면 자신의 감시하는 눈길이 등에 닿아 따가운 느낌이 들 때도 있었다.
말도 통하지 않고, 공안에 신고를 할 수도 없는 처지를 아는 중국인들은 탈북여성들을 함부로 대했다. 그들에게 탈북여성들은 ‘돈 주고 산 물건’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짐승만도 못한 삶. 그래도 “남편과 아들을 다시 만나기 위해 버텼다”는 강씨는 결국 자신과 살던 탈북여성이 도망친 것에 앙심을 품은 중국인 남자가 한 마을에 있던 강 씨를 비롯한 탈북여성들을 고발하면서 강제로 북송됐다.
“중국에서는 고되었지만, 그게 나았습니다. 교화소는 지옥이에요. 누가 죽어도 감정이 일지 않습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죽어나가니...”
보위부에서 ‘조국을 배반하고 월경을 했다’고 윽박지르며 ‘불순한 물건이 없는지 봐야 한다’고 알몸수색을 하던 것은 양반이었다. 손으로 더듬으며 항의하면 욕설과 폭언을 하던 보위부에서의 조사는 그때만 참으면 됐다. 그러나 교화소에서의 1년 남짓한 시간은 달랐다.
강 씨가 있던 곳은 북한 최악의 교화소 중 한 곳인 개천교화소. ‘최악’이라는 악명은 허풍이 아니었다.
강 씨는 “못 먹어 굶어 죽는 게 얼마나 고통스럽고 원통한지 아느냐”고 물었다. 보통 교화소에서는강냉이 300g(규정은 700g)과 염장배추국이 식사로 제공된다. 이것도 작업량이 모자라면 240g, 3회 연속 미달시에는 180g으로 줄어든다. 독방에 수감되면 고작 90g만을 받는다. 하루 17시간 이상 노동에 시달리고 굶주림에 배를 움켜 잡아야 했다.
강씨는 “강냉이도 모자라서 콩을 같이 같아 밥을 만들어 한 덩이씩 준다”며 “밥은 그래도 먹을 만 하지만, 염장배추국은 정말 사람이 먹을 음식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그녀는 그 역한 냄새를 맡은 듯 얼굴을 찌뿌렸다.
![]() |
◇ 탈북자 강씨가 대한민국 지도에서 자신의 고향 청진을 가리키고 있다. ⓒ데일리안 박항구 기자 |
툭하면 폭행도 이어졌다. 한번은 "말이 많다"고 50대 여성 수감자를 앞으로 불러냈다. 겁을 먹은 그 여성에게 간수는 "손 앞으로 내밀어 보라"고 말했다. 머뭇거리다 손을 내민 50대 여성의 손을 간수는 가차없이 갈고리로 찍었다. 손등은 피투성이가 되고 봉변을 당한 여성은 "아프니 살려달라"고 울며 빌었다. 그러자 간수는 “재수없게 말대꾸한다”고 아예 바닥에 내동댕이친 뒤 때리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동료 간수가 합세했다. “악 악”하는 그 여성의 비명소리가 잦아들 때까지, 움직임이 멈출 때까지 폭행을 계속됐다.
강 씨는 “간수들 눈을 보면 인간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며 “때리면서 죄책감도 미안함도 없다. 기분이 풀릴 때까지 때린다”고 전했다.
그 때까지만 해도 강 씨는 ‘조금만 견디면 된다’고 위안을 삼았다. 그러나 친구의 죽음을 목도한 이후, 강 씨는 “나도 죽겠구나”라는 생각에 희망을 버렸다.
“영양실조가 심하게 와서 중환자병동에 입원했단 말입니다. 그런데 청진에서 친했던 친구가 있는 거예요. 결핵을 앓는다는데 열이 펄펄 나요. 소염제도 변변히 없으니 약도 간간히 주고, 못 먹으니 몸이 엉망이란 말이에요. 그래 ‘많이 아프니, 뭐를 해주랴’고 물었더니 너무 심하게 아파서 말도 못하고 울어요. 한 3일쯤 아팠나, 하루는 의사가 와서 ‘심상치 않다’고 약을 하루 반 동안 집중 투여해요.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는지 닷새만에 죽었어요.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이지요.”
하지만 강 씨가 충격을 받은 것은 친구의 죽음 그 자체가 아니었다. 친구의 마지막은 죽은 이마저 생전과 같이 존중받아야 한다는 우리네 장례문화에서는 납득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강 씨가 본 것은 맥없이 스르르 생의 끈을 놓은 친구를 짐짝처럼 옮기는 모습이었다. 교화소의 간부들이 포대 하나를 들고 들어오는 게 보였다. ‘친구를 저기에 담는가. 그래도 저렇게 해도 되는가’ 울분도 났지만 말할 수 없는 처지였다. 멍하니 보고 있노라니 친구의 시신을 들어 올려 허리를 접어 반으로 꺾었다. 우두둑 우두둑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병동 안에 울렸다. 깨어 있던 환자들 모두가 그 순간, 조용해졌다. 소름끼치는 우두둑 소리에 강 씨와 환자들이 몸서리를 치는데도 간수들은 안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그대로 친구는 포대에 담겨져 창고에 하루 동안 방치됐다.
“추가로 누가 죽으면 같이 처리하려고 놔둔 것 같았다”고 입을 뗀 강 씨는 “탄광에서 남자 둘이 다음날 죽어 나오니까 같이 수레에 실어서 산에 올라가 태웠다”고 말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입술이 떨리고 눈물이 고였다.
“대한민국에서는 기르던 개가 죽어도 울면서 고이 장사지내주지 않습니까. 우린 개만도 못한 겁니다. 이름도 없이 억울하게 얼마나 많은 생명이 잿가루로 날라갔는지 아십니까. 수감자들은 무덤도 안 만들어주고 비석도 없으니까 누가 어떻게 됐는지 몰라요. 안 보이면 ‘죽었는가보다’ 합니다. 이게 말이 되는 일입니까.”
그녀는 ‘울컥’ 하는 듯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생의 의지가 없어졌다. 다만 무섭고 또 무서울 따름이었다. 그때 강씨는 아들을 떠올렸다. 중국에서 팔려가 고된 나날을 보내던 시절, 남편은 끝내 병으로 숨을 거뒀고, 하나뿐인 아들은 배고픔을 이기지 못해 꽃제비가 되어 집을 떠났다.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이미 아들이 사라진 지 수년이 지나서였다. ‘배 곯는 것보단 낫다’고 위안했지만 아들은 찾을 수 없었다. ‘청진에 다시 가면 찾으리라’ 생각했건만, 그대로 교화소로 오는 바람에 발이 묶였다.
강 씨는 “정신이 번쩍 났다. 이 안에서 죽어서 나가면 안 된다고 다짐했다”며 “악을 쓰고 살아남았다. 아들을 찾으려면 그 길 밖에 없으니까”라고 말했다.
“대한민국에 오고 나니 여기 사람으로 태어나지 못한 게 한스러웠다”는 강 씨는 “제일로 잘못하고 미안한 건 우리 아들인데, 여기서 태어났으면 그런 일 안 겪어도 됐는데 하는 원망도 들었다”고 고개를 숙였다.
![]() |
◇ 탈북자 강모씨는 북한 교화소에서 "하루 한끼 식사로 강냉이 함움큼과 썩은 배추국을 먹어야했다"며 몸서리쳤다. ⓒ데일리안 박항구 기자 |
강씨는 잠시 벽에 걸린 대한민국 지도를 빤히 쳐다봤다. 어루만지듯 청진을 응시하던 강 씨는 어렵사리 입을 뗐다. “대한민국이 세계적으로 이름 날리는데 도움되지도 않았는데 우릴 받아주니 고맙다”고, 그러나 한편으로는 “북한도 우리 영토이고 같은 민족이라면서 인권 문제를 외면하는 건 서운하고 속상하다”고.
“여기 와서 감동받은 게, 경찰이 시민들을 위해주는 겁니다. 경찰이 가까이 오길래 저쪽 생각만 하고 ‘벌 주려는가’ 움추렸더니 그게 아니라 인사를 합니다. 저쪽에서는 호령하고 괴롭혔는데 민주주의 국가가 다르긴 다르구나, 생각합니다. 저쪽에서도 이런 대접 받는 날이 오면 정말 좋을텐데...”
강씨는 “북한을 생각하면 답답하다”고 털어놓았다. 이해관계와 정치논리에 따라 북한과 협력하자고 하면서도 북한 사람들은 외국인처럼 대하고, 북한 인권은 남 일처럼 대하는 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강씨는 “뉴스에서 북한 인권에 대해 말하는 걸 듣지만 흥미있는 이야기로만 생각하는 것 같다”면서 “같은 동포라면서, 벽을 없애자면서 왜 북한 인권 문제만 쏙 빼는지 모르겠다”고 고개를 내저었다.
“북한 사람더러 ‘독하다’고 하는데 사실 외로움 많이 탑니다. 마음도 여리고..그런데 우리는 생존을 위해 살았어요. 강하기 않으면 죽습니다. 독해지려고 해서 그렇게 된 게 아니라 잘난 수령이 우릴 독하게 모질게 만들었습니다. 저쪽 가서 3일만 살아보십시오. 그럼 우리 마음 알 겁니다.”
강씨는 “살아있다면 20살쯤 되었을 아들”을 찾는 것이 유일한 희망이 됐다. 살아남았다는 감사함 보다 언제나 아들의 생사와 안부에 대한 염려가 앞선다. 그녀의 기도는 아들을 향한 모정을 한꺼번에 토해내는 울음이다.
“탈북자들은 상처가 많습니다. 가족, 친지가 죽고 잃어버리고 갖은 고생 다 하다가 여기 온 걸 아니까 서로 그런 속내는 말 안하려고 합니다. 가족관계도 말 안합니다. 아프니까. 가족이 그리워도 우리는 대한민국에 무사히 왔으니까 불평 안 합니다. 대한민국에 오려다 총 맞아 죽고 속아서 북송되고 도망친다고 하다가 강에 빠져 죽는 일도 부지기수예요. 다만...울분은 어디에 풀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잊고 싶은데 기억을 빼버릴 수도 없고, 무섭고 두려운 것도 말 못하고 느끼지도 못하고 사는 친구와 가족들을 생각하면 분합니다. 무얼 믿고 살았는가, 왜 그리 살았나 그런데 지금 뭘 해줄 수 있나 생각하면 슬픕니다. 짐승으로 태어났으면 하고 바라는 인생을 사는 사람들도 북한에 있다는 걸 알아주셨으면 합니다.”[데일리안 = 변윤재 기자]




댓글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보세요.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