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otonin Paper

세로토닌의 생각 조각들과 기록들 (2007 - 2012)

쥬이쌍스 17호 남자친구가 많은 여자

by 세로토닌 | 2008년 6월 21일 23:05
조회 659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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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하건데, 과거의 나는 현재의 나와 적(敵)이다. 하지만 그녀들은 모두ꡐ나ꡑ이기에 싸움은 언제나 내 안에서 끝나고 만다. 문제는, 과거의 내 모습을 하고서 나와는 다른 육체를 가진 사람과 마주쳤을 때 발생한다.

  그녀는 그랬다. 그녀에겐 여자친구보다 남자친구가 많았고 그래서 과거의 나와 꼭 닮은 뒤통수를 가지고 있었다. 예쁘장하고 꾸미길 좋아하면서도 은근히 털털한 그녀에게 늘 호감은 있었지만 그건 드러내기에도 민망한 혼자만의 것이었다. 그녀는 여자선배인 나와는 잘 만나주지 않았기에 얼굴조차 보기 힘들었으니. 그녀가 오빠, 오빠 거리며 잘 따르던 몇몇 남자동기들을 통해서나 가끔 그녀의 소식을 전해 듣곤 할뿐이었다. 난 이렇게 그녀의 이야기를 조근조근 들어볼 기회는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전혀 모르지는 않을 것 같다. 길바닥에, 이불위에, 책상아래에 버려두었던 내 과거의 허물들을 통해 난 그녀의 생각을 조금은 읽을 수 있을 것만 같다.




  나는 그러니까 그런 생각을 했더랬다. 여자애들이랑 노는 건 별로 즐거울 것이 못되는 일이라고. 감정적이고 예민한 그녀들은 걸핏하면 상처받고 삐지곤 해서 같이 놀면 피곤하고 불편했다. 조금은 무덤덤한 성격인 나는 눈물 많은 그녀들을 이해하고 쓰다듬으며 내 친구로 만들어가는 과정이 힘들었다. 정확히 말하면 귀찮았다. 난 사실 쿨-해지고 싶었으니까. 사람들이 멋대로 말하곤 하는 히스테리컬하고 연약해빠진 '전형적인 여자애'이미지엔 죽어도 부합하기 싫었다. 물론 행복한 결혼 생활을 꿈꾸며 장래희망 란에 선생님이나 간호사라고 또박또박 적어내는 ‘보통여자애’와도 다르길 원했다.

      언젠가부터 누군가가 날 '여자'로만 보지 않을까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혀왔다. 사회에서 끝없이 생산되고 규정되는 '여자'라는 테두리 속에 갇힐까봐 무서웠던 거다. 내겐 많은 가능성이 있고 남자보다 못나지도 않았는데 그 보이지 않는 금을 넘지 못하고 날개가 부러질까봐. 그래서 나 자신을 여성으로 정체화하면서도 한편으론 끊임없이 여성임을 부정하고 싶었다. 동성애자가 호모포비아에 빠지는 경우가 있듯 난 그렇게 서서히 woman-phobia에 물들어 왔다.









  그래서 내가 택한 길은 유사남성이 되는 방법이었다. 섬세한 여자애들을 몰래살짝 욕하고, 남자애들이랑 주로 놀면서 그들에게 연약한 여자가 아닌 특별한 존재로 인정받으려 했다. 다행히도 그들이 떠들어대는 주제는 항상 뻔했다. 난 여자애들은 잘 모르는 축구규칙이나 게임종류, 삼국지내용에 야금야금 지식을 쌓아가며 그들의 대화에 슬쩍 끼일 수 있었다. 남자애들이 니가 그걸 어떻게 아냐고 눈을 동그랗게 뜰 때 난 그저 말없이 웃곤 했다. 난 니들이 일컫는 '말이 안 통하는 여자애'와는 다른 존재니까! 라고 외쳐대는 얼굴을 어설프게 숨기며 달콤한 자만감에 푸욱 빠져 있곤 했다.

  남자애들은 나의 지식수준[!]에 빠르게 익숙해져 갔다. 그들은 차츰 나의 지식수준을 넘어서는, 배려 없고 일방적인 얘기들을 해댔다. 하지만 난 그들의 태도에 불편해하기는커녕 드디어 나를 그냥 남자애 보듯 하는구나 하며 룰루랄라거렸다. 그들이 나를 여느 남자친구 대하듯 막 대하면 대할수록 나는 내가 '여자'라는 사실을 잊을 수 있었고 사회도 내가 '여자'임을 보지 못할 것만 같았다. 같이 놀던 남자애들이 불쑥 내뱉던 "넌 여자도 아냐","니가 여자냐?"따위의 불친절한 말들이 내게 에너지증강 아이템과도 같은 존재가 되는 이상한 일은 그래서 발생할 수 있었다.




  물론 남자애들이랑 노는 건, 위닝도 스타도 축구도 못하는 내겐 오히려 노동에 가까웠다. 게다가 그들은 자신들이 가장 재미있게 놀 수 있는 순간엔 어김없이 나를 배제했다. 그들과 간단히 술을 한잔하고 나왔을 때 오묘한 기운이 감돌면 난 혼자 집에 돌아와야 했다. 남자애들이 이제 뭐하지? 뭐할까? 거리며 눈빛을 주고받는 건 이제 PC방에 갈 거라는 신호니까. 그럼 걔네들과 같이 술 마시는 게 재밌었냐 하면 그것조차 아니었다. 입으론 과반의 여성주의 담론을 씹으며, 눈으론 TV 속에서 빠르게 움직이는 축구선수의 발을 좇고 있는 그들과 어떻게 즐겁게 놀겠냐고. 남자애들과 놀면 놀수록 그들과 나 사이엔 벽돌이 하나씩 쌓여갔고 난 두꺼운 외로움으로 몸을 돌돌 말았다.

  

  하지만 또 끝없이, 이 괴로운 관계가 끊어질까봐 전전긍긍했다. 남자애들이랑 놀지 않으면 난 다시 그냥 그런 여자애가 되어버릴 것만 같았으니까. 난 날마다 휴대폰 수신함에 가득 찬 남자애들 이름을 보며 안심하고 뿌듯해 해야 했다.




  결국 그들과의 관계에서 난 여자로밖에 남을 수 없었다. 여자친구가 있는 남자애들에겐 여자의 마음을 잘 아는 사람으로서 연애상담을 해주었고, 여자친구가 없는 남자애들과는 애매한 유사연애관계에 빠지곤 했다. 남자애들 중 어느 누구도 나를 친구라는 위치에 두지 않았다. 그들과의 관계에서 난 끊임없이 감정노동을 했을 뿐이다. 친구와 친구라는 어여쁜 관계에서 서로를 다독여주고 아끼는 일은 그들과 나 사이에서는 성립할 수 없었다.

  뒤늦게 이 사실을 깨닫고 주위를 둘러보았을 때 ‘진짜 친구’가 되어줄 여자친구들은 내 곁에 없었다. 남자애들이랑 어울려 다니며 시간을 허비하는 동안 그들은 단짝이나 무리를 만들어 옹기종기 모여 있었고 내가 끼일 자리는 없었다. 심지어 어떤 여자애들은 내가 스캔들이나 내고 다니면서 주목받으려한다고 뒤에서 수근덕대기도 했다. 여자친구도 없고 남자와는 애초부터 친구라는 관계가 성립불가능 했던 거고, 그래서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한 주변인이 되어버렸다는 생각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여자친구도 없고

남자와는 애초부터 친구라는 관계가

성립불가능 했던 거고,

그래서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한

주변인이 되어버렸다는 생각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이렇게 살았던 '나'는 남들에겐 차마 말 못할 부끄러운 과거의 흔적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여성성을 하찮게 여기고 여성을 혐오했던 '나'는 지금은 끝난 싸움에서 날 지독히도 괴롭혔던 적(敵)으로 기억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그녀가 나타난 것이다. 그녀와 현재의 나, 그리고 과거의 나, 로 이루어진 3자 대면이 있고나서 난 하나의 깔끔한 식으로 설명될 수 없는 감정의 조합에 멀미가 났다. 그녀는 분명 나와 대적관계에 있다. 얄미운 그녀에게 너 그래서는 안 된다, 너 잘못하고 있는 거다, 라고 따끔하게 말해주고 싶지만 사실 측은한 마음과 안아주고픈 마음이 더 크다. 날마다 다른 남자친구와 남자선배들을 만나고 다니는 그녀도 언젠간 그 지독한 외로움을 겪을 거라는 사실을 아니까.

  

  그래, 지금 그녀는 은근히 자랑스러워하고 어쩌면 몰래몰래 잘나가는 여자라도 된 듯한 자신감에 빠져서 여자선배인 나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겠지. 하지만 난 그녀에게서 눈을 떼기가 힘들 거 같다. 그녀가 음습한 외로움을 느끼게 될 때 난 말없이 다가가 다독여줄 거다. 과거의 나와 오버랩된 그녀를 약간의 미움과 질책이 섞인 따뜻한 손으로 가만가만 쓰다듬어줄 거다. 니가 잘못한 게 아니라고. 넌 잠시 착각하고 잘못 판단하고 행동했던 것뿐이라고. 이젠 수줍고 따뜻한 여자친구들을 많이 사귀어 라고.

n* 세로토닌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8-06-22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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