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도 신윤복
by 세로토닌 | 2010년 5월 28일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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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의 그림에는 조선시대 서민들의 다양한 복식이 그려져 있다. 백성들은
단순한 서민복이 아니라, 때와 장소에 맞는 여러 가지 형태의 복식을 차려 입고
있다. 격식에 얽매이지 않고 옷을 하는 일에 따라서 다양하게 연출해서 입었다
는 점이 특이하다. 다양한 모자들은 그 단적인 예가 된다. 또한 여성들의 복식도
주목할 만 하다. 젖가슴을 드러내는 복식이 유행하는 양상도 관찰할 수 있다.
김홍도가 그린 풍속화는 의외로 적다. 지금 현재 내려오는 것은 국립중앙박물관
에 있는 화첩으로서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이 화첩의 그림 중에 씨름도를 보자, 이 씨름도는 그림 자체로도 매우 흥미로운
주제를 가지고 있지만, 우리는 이 그림에서 사람들이 들고 있는 부채를 보고 그
날이 단오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그림에서의 사람들의 씨름 자세를 보고
그 당시의 씨름 풍속도 관찰할 수 있다.
하지만 김홍도 그림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김홍도의 그림이 매우 기억하기
쉽다는 것이다. 시각적으로 사실적인 묘사보다는 강조를 위한 의도적인 변형으
로 사실과는 다르게 그렸지만, 인상에 매우 잘 남는다. 정확한 비례, 힘찬 구도,
뇌간을 자극하는 필력이 김홍도 그림의 포인트인 셈이다.
그런데 왜 김홍도의 그림은 하필 이 시기에 백성의 삶을 그리게 된 것일까? 18
세기 조선은, 중국이 청나라로 바뀌면서 조선으로서는 선진 문화의 계승자로서
의 자부심을 가지고, 스스로의 문화에 대해서 매우 긍정적인 시선을 가지고 다
가가게 되었다. 이때 김홍도는 정조 시대에 국왕의 공식 화원으로서 활동했다.
정조는 국정보고자료로서 풍속화나 기록화를 보고 싶어했다. 그리하여 도화서와
는 관계없이 특별 화원 10명을 뽑아 그림을 그리게 했고, 과제를 출제했는데 그
중 가장 많이 출제된 것이 풍속화였다.
김홍도의 풍속화에서는 서민 아이들이 글공부를 하는 당시의 변화 모습도 관찰할 수 있는 등 여러가지 신분제의 변화 등 조선의 변화 모습도 관찰할 수 있다. 또한 풍속화는 왕 뿐만 아니라 서민들에게도 시장에서 유통되는 등 모든 사람들이 시장에서 유통하면서 즐겼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이렇게 김홍도의 그림은 윌에게 18세기 조선에 대해서 매우 많은 사실을 알 수 있게 한다.
지금 우리는 우리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거나 그림으로 그리는데 매우 익숙하다. 하지만 그림이라는 형식 자체가 매우 희귀하고 신기한 것이었던 시절, 특별하고 중요한 것이 아니라 소박하고 서민적인 우리 자신의 모습을 그림으로 남긴다는 것은 그 당시로서는 매우 충격적이고 특이한 것이었을 것임을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김홍도 같은 선구자가 있어 소중한 그림을 많이 남겼기에 우리는 또 그 당시 상황을 되돌아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혜원 신윤복
예술성을 지닌 에로티시즘이라는 200년 후의 평가를 받는 신윤복의 그림. 우리의 주목을 끄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다른 풍속화에서는 볼 수 없는 남녀간의 여흥을 그린 것이 많기 때문이다. 남녀간의 자유연애와 성 풍속도를 그려낸 신윤복의 그림들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어떻게 신윤복은 이런 과감한 그림들을 자세하고 정밀하게 그릴 수 있었을까? 실제로 신윤복의 존재는 의문에 싸여 있다. 당시대의 기록은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고, 신씨 족보에도 가계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 이유는 서자이기 때문이라고 추측된다. 신윤복의 아버지 이름만이 화원의 이름 중에서 발견되었을 뿐이다.
신윤복은 도화서에서 김홍도를 많이 배워 그림을 완성하였고, 젊은 시절에는 방황하는 젊은 예술인으로서 살았다. 이후 그에 관한 기록은 전혀 남아 있지 않고, 단지 그의 그림들만이 그의 존재를 확인시켜준다. 그의 그림의 특징으로서 후대 평론가들은 여러 가지를 꼽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 하나는 여성이 등장하지 않는 그림이 단 하나도 없다는 것이었다. 또한 그들은 심지어 그림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있다. 하지만 신윤복의 그림처럼 그 당시 여자들이 자유분방한 삶을 누렸을까? 하면 오히려 그렇지 않다. 국가 체계를 견고히 만드는 과정에서 사대부들은 여성과 남성의 내외법을 더 강화하였다는 것이다. 이때 조선 후기로 가면서 하층으로부터 내외법이 서서히 무너져가는 풍속을 신윤복이 그렸다는 해석이 있다. 억압되고 감추어져 있었던 본능과 섹슈얼리티의 틈을 파고든 그림들이었던 것이다.
신윤복의 그림을 통해 우리는 기방 문화를 즐겼던 당시 양반 관료들의 유흥 문화도 알 수 있다. 심지어 기생을 데리고 살았던 양반들도 있었던 것을 보면 기방 문화는 사회에 매우 만연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양반보다는 중인 계층이 이 그림들의 주요 모티브였던 것으로 보인다. 중인 계층은 관직으로 나갈 수 없지만 역관/의관 활동을 통해 번 많은 돈을 축적하였고, 문화 자체가 매우 소비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신윤복 그림의 시대상을 형성함과 동시에, 그 그림을 소비하는 주체가 된다.
여항문학운동과 당시 화원들의 그림과도 매우 큰 연관이 있다. 당시 바뀌어 가는 사회를 예리한 눈으로 바라보았던 여항문인의 눈은 신윤복이 가진 그것과 별로 다르지 않은 것이다.
추사 김정희의 문인화풍 그림이 등장하는 상징적인 사건이 일어나면서, 풍속을 어지럽힌다는 이름을 쓰고 신윤복의 그림은 그렇게 사라져 가게 된다. 하지만 100년 후 일제 식민통치 하에서 신윤복의 그림은 한 일본인의 주목을 받게 되고, 그의 그림에 대한 열풍이 만들어지게 된다.
신윤복은, 조선 최초의 에로티시즘 화가로서, 또한 본능과 욕망이 억눌린 유교 사회에서 사실적으로 사회상을 그려냈다는 점에서 매우 큰 의의가 있다. 화가가 당대의 삶을 그림으로 나타낸다는 것은 근대 정신이 시작된다는 것과 같게 볼 수 있다. 김홍도와 같이 신윤복도 우리에게 있어서는 당시의 모습을 정해준 소중한 선조로서 존경해야 할 것이다.
단순한 서민복이 아니라, 때와 장소에 맞는 여러 가지 형태의 복식을 차려 입고
있다. 격식에 얽매이지 않고 옷을 하는 일에 따라서 다양하게 연출해서 입었다
는 점이 특이하다. 다양한 모자들은 그 단적인 예가 된다. 또한 여성들의 복식도
주목할 만 하다. 젖가슴을 드러내는 복식이 유행하는 양상도 관찰할 수 있다.
김홍도가 그린 풍속화는 의외로 적다. 지금 현재 내려오는 것은 국립중앙박물관
에 있는 화첩으로서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이 화첩의 그림 중에 씨름도를 보자, 이 씨름도는 그림 자체로도 매우 흥미로운
주제를 가지고 있지만, 우리는 이 그림에서 사람들이 들고 있는 부채를 보고 그
날이 단오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그림에서의 사람들의 씨름 자세를 보고
그 당시의 씨름 풍속도 관찰할 수 있다.
하지만 김홍도 그림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김홍도의 그림이 매우 기억하기
쉽다는 것이다. 시각적으로 사실적인 묘사보다는 강조를 위한 의도적인 변형으
로 사실과는 다르게 그렸지만, 인상에 매우 잘 남는다. 정확한 비례, 힘찬 구도,
뇌간을 자극하는 필력이 김홍도 그림의 포인트인 셈이다.
그런데 왜 김홍도의 그림은 하필 이 시기에 백성의 삶을 그리게 된 것일까? 18
세기 조선은, 중국이 청나라로 바뀌면서 조선으로서는 선진 문화의 계승자로서
의 자부심을 가지고, 스스로의 문화에 대해서 매우 긍정적인 시선을 가지고 다
가가게 되었다. 이때 김홍도는 정조 시대에 국왕의 공식 화원으로서 활동했다.
정조는 국정보고자료로서 풍속화나 기록화를 보고 싶어했다. 그리하여 도화서와
는 관계없이 특별 화원 10명을 뽑아 그림을 그리게 했고, 과제를 출제했는데 그
중 가장 많이 출제된 것이 풍속화였다.
김홍도의 풍속화에서는 서민 아이들이 글공부를 하는 당시의 변화 모습도 관찰할 수 있는 등 여러가지 신분제의 변화 등 조선의 변화 모습도 관찰할 수 있다. 또한 풍속화는 왕 뿐만 아니라 서민들에게도 시장에서 유통되는 등 모든 사람들이 시장에서 유통하면서 즐겼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이렇게 김홍도의 그림은 윌에게 18세기 조선에 대해서 매우 많은 사실을 알 수 있게 한다.
지금 우리는 우리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거나 그림으로 그리는데 매우 익숙하다. 하지만 그림이라는 형식 자체가 매우 희귀하고 신기한 것이었던 시절, 특별하고 중요한 것이 아니라 소박하고 서민적인 우리 자신의 모습을 그림으로 남긴다는 것은 그 당시로서는 매우 충격적이고 특이한 것이었을 것임을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김홍도 같은 선구자가 있어 소중한 그림을 많이 남겼기에 우리는 또 그 당시 상황을 되돌아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혜원 신윤복
예술성을 지닌 에로티시즘이라는 200년 후의 평가를 받는 신윤복의 그림. 우리의 주목을 끄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다른 풍속화에서는 볼 수 없는 남녀간의 여흥을 그린 것이 많기 때문이다. 남녀간의 자유연애와 성 풍속도를 그려낸 신윤복의 그림들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어떻게 신윤복은 이런 과감한 그림들을 자세하고 정밀하게 그릴 수 있었을까? 실제로 신윤복의 존재는 의문에 싸여 있다. 당시대의 기록은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고, 신씨 족보에도 가계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 이유는 서자이기 때문이라고 추측된다. 신윤복의 아버지 이름만이 화원의 이름 중에서 발견되었을 뿐이다.
신윤복은 도화서에서 김홍도를 많이 배워 그림을 완성하였고, 젊은 시절에는 방황하는 젊은 예술인으로서 살았다. 이후 그에 관한 기록은 전혀 남아 있지 않고, 단지 그의 그림들만이 그의 존재를 확인시켜준다. 그의 그림의 특징으로서 후대 평론가들은 여러 가지를 꼽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 하나는 여성이 등장하지 않는 그림이 단 하나도 없다는 것이었다. 또한 그들은 심지어 그림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있다. 하지만 신윤복의 그림처럼 그 당시 여자들이 자유분방한 삶을 누렸을까? 하면 오히려 그렇지 않다. 국가 체계를 견고히 만드는 과정에서 사대부들은 여성과 남성의 내외법을 더 강화하였다는 것이다. 이때 조선 후기로 가면서 하층으로부터 내외법이 서서히 무너져가는 풍속을 신윤복이 그렸다는 해석이 있다. 억압되고 감추어져 있었던 본능과 섹슈얼리티의 틈을 파고든 그림들이었던 것이다.
신윤복의 그림을 통해 우리는 기방 문화를 즐겼던 당시 양반 관료들의 유흥 문화도 알 수 있다. 심지어 기생을 데리고 살았던 양반들도 있었던 것을 보면 기방 문화는 사회에 매우 만연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양반보다는 중인 계층이 이 그림들의 주요 모티브였던 것으로 보인다. 중인 계층은 관직으로 나갈 수 없지만 역관/의관 활동을 통해 번 많은 돈을 축적하였고, 문화 자체가 매우 소비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신윤복 그림의 시대상을 형성함과 동시에, 그 그림을 소비하는 주체가 된다.
여항문학운동과 당시 화원들의 그림과도 매우 큰 연관이 있다. 당시 바뀌어 가는 사회를 예리한 눈으로 바라보았던 여항문인의 눈은 신윤복이 가진 그것과 별로 다르지 않은 것이다.
추사 김정희의 문인화풍 그림이 등장하는 상징적인 사건이 일어나면서, 풍속을 어지럽힌다는 이름을 쓰고 신윤복의 그림은 그렇게 사라져 가게 된다. 하지만 100년 후 일제 식민통치 하에서 신윤복의 그림은 한 일본인의 주목을 받게 되고, 그의 그림에 대한 열풍이 만들어지게 된다.
신윤복은, 조선 최초의 에로티시즘 화가로서, 또한 본능과 욕망이 억눌린 유교 사회에서 사실적으로 사회상을 그려냈다는 점에서 매우 큰 의의가 있다. 화가가 당대의 삶을 그림으로 나타낸다는 것은 근대 정신이 시작된다는 것과 같게 볼 수 있다. 김홍도와 같이 신윤복도 우리에게 있어서는 당시의 모습을 정해준 소중한 선조로서 존경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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