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멜리 노통 - 앙테크리스타
by 세로토닌 | 2006년 12월 14일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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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경향을 단적으로 이야기해 볼 때, 이전 작가들이 범사회적인 가치를 작품에 투영했던 것과는 달리 현대에는 개인적 차원의 요소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현대 사회의 특징 그 자체가 개인적이라는 면에서 같은 맥락으로 볼 수도 있겠습니다.
개인의 삶에 개입하지 않는 현대사회의 기계적 배려와 의사소통의 필요성 감소는 사람들로 하여금 끼어들 수 없는 다른 사람들의 삶을 궁금하게 합니다. 이런 수요는 일부의 자전적 혹은 1인칭 자아의 독백을 중심으로 하는 소설 작품들의 탄생 배경이 됩니다.
노통의 소설은 이런 현대 소설의 전형적 특징을 갖추고 있습니다. 다소 냉소적이면서도 한 개인의 주관에서, 그러니까 그의 최근작인 "앙테크리스타" 에서 그는 그만의 세계 속의 개인인 "블랑슈"를 "크리스타"라는 주인공의, 혹은 독자들에게 있어 '공공의', 적을 이용해 효과적으로 형상화합니다.
주요 작품에서 노통은 화자 혹은 '절대적'인 존재를 순수한 소녀로 설정합니다. 아니, 오히려 화자보다는 화자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대상이 그렇게 묘사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어쨌건 이들은 작든 크든 주인공이든 아니든 이야기의 전개와 진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개인적 상징인 '소녀'는 이미 어른이며 성숙하고 오염된 지금의 노통, 혹은 책을 읽는 독자들, 어쩌면 오염되어 오염된 줄 모르는 우리 사회와는 정반대의 모습을 나타내는 캐릭터입니다. 그리고 이 소녀는 그의 작품 안의 '적'과 같거나 비슷한 역할을 하는, 일맥상통하는 존재입니다.
그의 인터뷰 중에 '12살에 자신 안에 적이 생겼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적'에 대해 못난 자신을 '아름다움'으로써 일깨우는 미소녀이자 자신을 헐뜯고 깎아내리고 비웃는 '적' 인 그의 초자아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노통의 작품 속 초자아들의 시선은 주인공보다 오히려 작품 밖의 우리를 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깎아내려야할 주인공의, 혹은 우리의 야만적 본성 즉 '이드'를 불러냅니다. 작품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의지대로 행동하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결국은 이드 즉 주인공이 '아름다운 적' 즉 초자아를 살해하며 이야기를 끝낼 뿐입니다.
노통이 전하고 싶었던 것이 과연 '이드'가 '초자아'를 극복해야 한다는 이야기일까요?
저는 오히려 이런 해석을 한 번 해보고 싶습니다. 소녀를 보고 순수성을 열망하고 사랑하는 노통 혹은 우리의 자아는 쉽게 다가갈 수 없는 그 소녀 혹은 초자아의 벽에 부딪쳐 절망하고, 그 벽 자체를 적으로 인식합니다. 그리고 그 벽을 뛰어넘고 싶어하는 우리의 이드가 나타나서 결국은 그 벽을 파괴하게 되는데, 그와 동시에 우리의 열망의 대상이자 초자아인 소녀는 사라져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벽' 과 순수성은 곧 같은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벽을 없애는 것이 곧 이상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이상은 다가가지 못함에 그 의미가 있습니다. 윤리학에서 말하는 절대선도, 그 연구자들에게도 부정받고 있지만 그들이나 인류 전체에게나 언제나 하나의 이상으로서 기능을 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다면 노통이 말하는 것은, 초자아를 그대로 놔두어야 한다는 말인가요?
언제나 그의 작품에서 나타나듯이 우리의 초자아는 살해당하고, 죽습니다. 이상을 위해서 이상이 없어집니다. 여기에 대해서 우리는 뭐라고 이야기하면 좋을까요? 문제는 이드가 지향했던 진정한 가치가 초자아 그 자체가 아니었다는 데에 있습니다. 초자아는 이드에게 있어 이상이며, 이상을 속박하는 존재입니다. 그런 초자아를 이드는 동경하고 사랑합니다. 그러나 이드가 바라는 것은 결국은 자신을 옭아매게 되는 초자아로부터의 해방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초자아가 사느냐 죽느냐가 아니라 이 둘의 관계를 어떻게 해명하느냐입니다. 다시 이야기를 돌려 실제 사회 속에 이 이야기를 적용해 보면, 현대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미디어와 집단 속에서 주입된 생각과 타율적인 감각 속에서 사는 일은 신기한 일이 아닙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중독되기까지 합니다. 우리는 이 집단적인 흐름을 또다른 초자아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이들은 이 이상적인 초자아가 자신에게서 근거한 것이 아님을 모릅니다. 또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깨닫지 못합니다.
이들이 이 속박에서 벗어나려면 자신의 이드를 발현시켜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자신의 것이 아닌 것들을 당당하게 버릴 수 있는 힘을 발휘하는 길 뿐입니다. 자신을 당당하게 밝히지 못하는 이들에게 노통의 소설은 의미를 가집니다. 당신에게 이드는 존재하냐고. 부당한 초자아를 극복해 낼 의지를 가진 이드가, 혹시 당신에게 없는 건 아니냐고. 어쩌면 노통이 원했던 진짜 대립은 외부적이고 인공적인 초자아와 이드의 대립입니다. 이드가 야만적이기보다 자신으로서 원하는 것을 타원적 초자아를 극복함으로써 되찾는 것, 그것이 노통이 진짜로 원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작품 외적인 이야기지만, 굉장히 많은 여백을 두었어도 얇은 그의 책은 책에 쉽게 빠지게 하지만 나오기 힘들게 합니다. 이번 책은 그의 결정체라는 느낌이 들어서, 하나하나 빼놓지 않고 굉장히 '잘 읽었다' 라는 생각마저 들게 합니다.
아, 그리고 위에 쓴 초자아와 이드의 이야기는, 중학교 때 도덕 선생님께 들었던 개념이 전부입니다. 저로썬 나름대로 그 정도 개념이라고 생각하고 썼는데, 좀 더 전문적으로 들어가면 왕창 깨질 가능성도 있는 것 같습니다 -_ㅠ 정신분석 공부하겠습니다^-^ 용서해주세요!
다 읽은 후 역자 후기를 읽으면서 이 책을 어떻게 해석할까 하는 데 도움을 많이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단 한가지 동의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었다면 그가 노통이 다른 작품을 출산해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노통이 여자라는 점에 착안한 나름대로의 발상이었을텐데, 노통으로서는 기분나쁠 발언입니다. 왜냐하면 노통은 소녀를 지향하기 때문입니다. 노통이 쓰는 것은 '출산'되지 않습니다. 그저 소녀를 위한 소녀와의 싸움을 기록할 뿐입니다.
오랫만에 읽고 이만큼 글을 쓸 수 있는 작품을 만나서 기쁩니다. 이건 앙테크리스타뿐 아니라 다른 노통 작품들에서 느꼈던 점들을 모은, 어쩌면 노통에 대한 의견을 총정리한 거라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1년에 한번씩 맞춰서 나온다는 그의 책을 저는 기다리겠지만, 제가 지금까지 쓴 것 이상의 감흥을 느낄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입니다.
개인의 삶에 개입하지 않는 현대사회의 기계적 배려와 의사소통의 필요성 감소는 사람들로 하여금 끼어들 수 없는 다른 사람들의 삶을 궁금하게 합니다. 이런 수요는 일부의 자전적 혹은 1인칭 자아의 독백을 중심으로 하는 소설 작품들의 탄생 배경이 됩니다.
노통의 소설은 이런 현대 소설의 전형적 특징을 갖추고 있습니다. 다소 냉소적이면서도 한 개인의 주관에서, 그러니까 그의 최근작인 "앙테크리스타" 에서 그는 그만의 세계 속의 개인인 "블랑슈"를 "크리스타"라는 주인공의, 혹은 독자들에게 있어 '공공의', 적을 이용해 효과적으로 형상화합니다.
주요 작품에서 노통은 화자 혹은 '절대적'인 존재를 순수한 소녀로 설정합니다. 아니, 오히려 화자보다는 화자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대상이 그렇게 묘사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어쨌건 이들은 작든 크든 주인공이든 아니든 이야기의 전개와 진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개인적 상징인 '소녀'는 이미 어른이며 성숙하고 오염된 지금의 노통, 혹은 책을 읽는 독자들, 어쩌면 오염되어 오염된 줄 모르는 우리 사회와는 정반대의 모습을 나타내는 캐릭터입니다. 그리고 이 소녀는 그의 작품 안의 '적'과 같거나 비슷한 역할을 하는, 일맥상통하는 존재입니다.
그의 인터뷰 중에 '12살에 자신 안에 적이 생겼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적'에 대해 못난 자신을 '아름다움'으로써 일깨우는 미소녀이자 자신을 헐뜯고 깎아내리고 비웃는 '적' 인 그의 초자아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노통의 작품 속 초자아들의 시선은 주인공보다 오히려 작품 밖의 우리를 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깎아내려야할 주인공의, 혹은 우리의 야만적 본성 즉 '이드'를 불러냅니다. 작품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의지대로 행동하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결국은 이드 즉 주인공이 '아름다운 적' 즉 초자아를 살해하며 이야기를 끝낼 뿐입니다.
노통이 전하고 싶었던 것이 과연 '이드'가 '초자아'를 극복해야 한다는 이야기일까요?
저는 오히려 이런 해석을 한 번 해보고 싶습니다. 소녀를 보고 순수성을 열망하고 사랑하는 노통 혹은 우리의 자아는 쉽게 다가갈 수 없는 그 소녀 혹은 초자아의 벽에 부딪쳐 절망하고, 그 벽 자체를 적으로 인식합니다. 그리고 그 벽을 뛰어넘고 싶어하는 우리의 이드가 나타나서 결국은 그 벽을 파괴하게 되는데, 그와 동시에 우리의 열망의 대상이자 초자아인 소녀는 사라져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벽' 과 순수성은 곧 같은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벽을 없애는 것이 곧 이상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이상은 다가가지 못함에 그 의미가 있습니다. 윤리학에서 말하는 절대선도, 그 연구자들에게도 부정받고 있지만 그들이나 인류 전체에게나 언제나 하나의 이상으로서 기능을 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다면 노통이 말하는 것은, 초자아를 그대로 놔두어야 한다는 말인가요?
언제나 그의 작품에서 나타나듯이 우리의 초자아는 살해당하고, 죽습니다. 이상을 위해서 이상이 없어집니다. 여기에 대해서 우리는 뭐라고 이야기하면 좋을까요? 문제는 이드가 지향했던 진정한 가치가 초자아 그 자체가 아니었다는 데에 있습니다. 초자아는 이드에게 있어 이상이며, 이상을 속박하는 존재입니다. 그런 초자아를 이드는 동경하고 사랑합니다. 그러나 이드가 바라는 것은 결국은 자신을 옭아매게 되는 초자아로부터의 해방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초자아가 사느냐 죽느냐가 아니라 이 둘의 관계를 어떻게 해명하느냐입니다. 다시 이야기를 돌려 실제 사회 속에 이 이야기를 적용해 보면, 현대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미디어와 집단 속에서 주입된 생각과 타율적인 감각 속에서 사는 일은 신기한 일이 아닙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중독되기까지 합니다. 우리는 이 집단적인 흐름을 또다른 초자아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이들은 이 이상적인 초자아가 자신에게서 근거한 것이 아님을 모릅니다. 또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깨닫지 못합니다.
이들이 이 속박에서 벗어나려면 자신의 이드를 발현시켜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자신의 것이 아닌 것들을 당당하게 버릴 수 있는 힘을 발휘하는 길 뿐입니다. 자신을 당당하게 밝히지 못하는 이들에게 노통의 소설은 의미를 가집니다. 당신에게 이드는 존재하냐고. 부당한 초자아를 극복해 낼 의지를 가진 이드가, 혹시 당신에게 없는 건 아니냐고. 어쩌면 노통이 원했던 진짜 대립은 외부적이고 인공적인 초자아와 이드의 대립입니다. 이드가 야만적이기보다 자신으로서 원하는 것을 타원적 초자아를 극복함으로써 되찾는 것, 그것이 노통이 진짜로 원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작품 외적인 이야기지만, 굉장히 많은 여백을 두었어도 얇은 그의 책은 책에 쉽게 빠지게 하지만 나오기 힘들게 합니다. 이번 책은 그의 결정체라는 느낌이 들어서, 하나하나 빼놓지 않고 굉장히 '잘 읽었다' 라는 생각마저 들게 합니다.
아, 그리고 위에 쓴 초자아와 이드의 이야기는, 중학교 때 도덕 선생님께 들었던 개념이 전부입니다. 저로썬 나름대로 그 정도 개념이라고 생각하고 썼는데, 좀 더 전문적으로 들어가면 왕창 깨질 가능성도 있는 것 같습니다 -_ㅠ 정신분석 공부하겠습니다^-^ 용서해주세요!
다 읽은 후 역자 후기를 읽으면서 이 책을 어떻게 해석할까 하는 데 도움을 많이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단 한가지 동의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었다면 그가 노통이 다른 작품을 출산해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노통이 여자라는 점에 착안한 나름대로의 발상이었을텐데, 노통으로서는 기분나쁠 발언입니다. 왜냐하면 노통은 소녀를 지향하기 때문입니다. 노통이 쓰는 것은 '출산'되지 않습니다. 그저 소녀를 위한 소녀와의 싸움을 기록할 뿐입니다.
오랫만에 읽고 이만큼 글을 쓸 수 있는 작품을 만나서 기쁩니다. 이건 앙테크리스타뿐 아니라 다른 노통 작품들에서 느꼈던 점들을 모은, 어쩌면 노통에 대한 의견을 총정리한 거라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1년에 한번씩 맞춰서 나온다는 그의 책을 저는 기다리겠지만, 제가 지금까지 쓴 것 이상의 감흥을 느낄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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