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쿨함에 대해서.
by 세로토닌 | 2007년 1월 15일 00:51
조회 1016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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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대부분의 경우 쿨한 쪽과 쿨하지 않은 쪽이 대화를 하다보면 쿨하지 않은 쪽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찌질이’가 된 기분을 지우기 어려운 것이다. 자신만이 속 좁고 못나 보이기 마련. 그래서 간간이 찾아오는 그런 경험들로 인하여 사람들은 평균적으로 쿨해지기 마련이다. 마치 그것은 신종 페스트와 같이 순식간에 퍼져나가, 어느새 지금은 사회의 트렌드로 자리잡아 버리게 된 것이다. 어느 안방 드라마 오프닝 송에 나와도 의아스럽지 않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또, 사람과 사람이 만나던 방식 중 의외성에 기반한 것이 많아졌다는 사실도 한 가지 이유가 될 수 있겠다. 사람들은 일회성 만남에 익숙해졌으며, 그런 만남을 주선할 수 있는 장소도 예전에 비해서 많아졌다. 일단 일회성 만남 자체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졌기 때문에 길거리를 지나는 사람들 중 마음에 드는 누구에라도 접근하기가 용이해진 것이다..............[중략]
그렇게 현대사회는 가볍고 쉽다. 충분히 쿨할만큼 쿨해졌다고 생각한다. 만남도, 사랑도, 섹스도, 이별조차 쉽다. 사람들은 말한다. 이별이 쿨해야 한다는 것은 구차하게 서로 눈물 쏟으며 질질 끌지 않는 것, 깔끔하고 뒤끝없는 완벽한 감정 정리를 통해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그 길 위에서도 다른 누군가를 유혹할 수 있을 정도의 마음가짐이라고. 이틀 후 마주친, 서로 다른 커플 - 나와 전 애인 - 의 어색할 법한 상황에서도 안녕, 하고 생긋 웃으며 손 흔들어줄 수 있어야 한다고.
하지만 그런 이야기들을 들을 때 마다 나는 매번 가슴팍을 세게 한 번 차인 기분을 버릴 수 없다. 그럴거면 연애를 하는 목적, 아니 더 거슬러 올라가서 사람을 만나는 목적이 대체 무어란 말인가......... [후략]
"쿨함에 대하여" 병장 이준영, 05. 11. 16. 중 발췌
“내가 요즘 애들 같게, 그리고 너처럼 쿨하지 못해서 미안한데, 그래도 난 네가 이해가 안돼.”
3년 가까이를 사귀었던 그 녀석과 어느 날, 나는 정말 심하게 싸웠다. 잘 아는 여자 후배 아이를 내가 혼자 사는 자취방에 하룻밤을 재웠고, 글자 그대로 수면만 취하고 (난 그 옆에서 게임하며 밤을 지새웠다. 엠파이어어스라는, 게임이 너무 재밌어서 난 그 후배에게 뭔가 수작을 걸 생각 따위를 할 틈조차 없었다) 아침에 밥을 지어 먹인 후 돌려보냈다는 사실을 그 녀석이 알게 된 직후였다. 난 태어나서 처음으로 쿨하다는 말을 들었고, 그 이후로도 쿨하다는 평을 다시 들은 적은 없었다. 그러나 그 녀석은 헤어질 때까지 계속, 나를 쿨한 성격의 소유자로 생각했던 것 같다. 쿨함을 추구하는 사회 담론을 그토록 증오했기 때문에 막상 내가 그 평가를 받고 나선 한동안 죄책감에 꽤나 시달렸던 것 같다.
문제는 내가 항상 쿨한 이들을 증오했다는 것에서 시작한다. 쿨하다는, 관계의 피상성을 전제로 한 새로운 인간관계의 전형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힘들었기 때문이다. 쿨하다는 것은 관계의 시작과 단절에서 질질 끌거나 매달리지 않고 시원하게, 깔끔하게 끝맺음한다는 것을 말한다. 시원하게, 헤어지는 애인을 잡지도 않고 깔끔하게, 약속을 이리저리 잡고서 쩔쩔 매지도 않는다. 지켜보는 제 3자의 입장에서 보면 지저분해 보일 면도 없고 모든 관계가 매끄러울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애정을 품은 대상과의 관계를 쉽게 포기할 수 있는가? 애정은 속박이고, 애정하는 자의 마음에 미련을 남기기 마련이다. 쿨하다는 것은 따라서 인간관계에서 책임지지 않겠다는 심리를 기저에 깔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질퍽한 관계성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결국 침몰해버리는 이들을 비웃고, 인간관계의 늪을 우회해 걷는 것을 우리는 쿨하다 말한다.
따라서 외로움을 기피하는, 정이 전제된 인간관계를 원하는 이들은 쿨하다는 표현을 싫어한다. 인간관계에 정이 바탕으로 작용하기 위해선 자신이 맺고 있는 관계에 책임을 지려는 태도가 필요하다. 책임은, 적확하게 대응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아파하고 슬퍼할 감정적 변화로 대체로 갈음할 수 있다. 쿨하다는 것은 이같은 책임을 두려워하는, 책임을 기피하려는 태도를 말한다. 쿨하게, 책임지지 않는 태도. 보통 부정적인 의미로 쿨함을 칭할 때 그 단어에 내포된 의미는 대략 이러하다.
쿨함을 책임의 면피를 도모하는 심리적 상태로 규명했을 경우, 당연하게도 왜 쿨함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이들은 겉보기에 시원해 보이는 그 관계 자체를 선호하는 것이다. 현대의, 숱하게 다양한 사람을 만날 기회와 헤어질 기회를 통해 빈번해지는 이별에서 고통 받기를 원하지 않는 것이다. 너무 다양하게 만난 사람 중 단지 한 명이었을 뿐이므로, 이별에 슬픔을 느낄 정도로 정이 들지 않은 사람이지만, 그러나 이별시 소원하게 헤어지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은 기존의 윤리관에 비추어 바르지 않다. 따라서 그리 가깝지는 않던 지인을 떠나보내는 사람은 당혹스럽다. 혹은, 숱한 사람을 만나지만 그 속에서 정을 나눌 정도로 깊은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은데, 그 많지 않은 한 사람과 이별해야할 경우의 슬픔을, 우리는 평소 숱하게 해왔던 이별에서 단련시킬 수 없다. 따라서 친밀하던 사람을 떠나보내는 것은 너무 감당하기 힘든 고통일 수 있다. 쿨하다면, 그러지 않을 수 있다. 관계성 자체에 쿨함이 전제되기 시작하면 깊이 있는 관계의 단절에서 슬퍼하지 않을 수 있고, 쉬운 관계를 또한 쉽사리 밝게 웃으며 끝맺음 할 수 있다. 전혀 상반되는 두가지 경우에 모두, 쿨함은 새로운 덕목으로 제시되어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쿨함이라는 가치는 현대 사회의 한 부분으로 편입될 수밖에 없다. 우리에게 주어진 유한한 시간에 비해 지나치게 방대한 만남의 기회가 주어진, 현대에서는. 다만 표면으로, 21세기가 되어서야 쿨함이 표면 위로 도출된 이유는 다름 아닌 인터넷과, 자유가 본격화된 90년대 초반에 청춘을 보냈던 이들이 20대 후반에 들어섰기 때문이라 보인다.
그러므로 쿨함은 일종의 방어기제로 해석할 수 있다. 단절에서 상처받기 싫다는 심리에서 시작해 관계 자체에 내재된 무게를 제거하는 것으로, 쿨함을 읽을 수 있다. 혹은 우마차와 서편으로 대변되는 이전 시대의 인간관계의 특징에서 성립한 덕목을 인터넷과 자동차로 대변되는 현대 사회의 특징에 입각한 것으로 교체해 가는 과정으로도 또한 읽을 수 있다. 사회 저변이 변화하면 의식도 변화해야하며 그 기간에 진통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우리가 모두 쿨해야 하는가? 분명 쿨한 사람은 존재한다. 가볍게 언제나 즐겁게 일상을 대하고 타인을 대면하는 이들을 우리는 드물지 않게 주변에서 목격할 수 있다. 그들과의 대화는 기분 나쁘지 않고, 그들도 가볍게, 나를 대하기에 기분 나쁠 일도 없다. 그러나 그들의 존재가 우리가 쿨함을 추구해야하는가, 혹은 용인해야하는가의 여부를 결정짓는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쿨한 성격을 갖고 있는 이들의 존재는 개인적인 문제일 따름이다. 여기서 논의되어야할 것은 왜 쿨함이고, 어떻게 쿨해야 하는가라는 사회적인 분석이다.
앞서도 말했듯이 나는 쿨함이라는 평가를 싫어한다. 쿨함은 책임을 전제하지 않음을 뜻하고, 이는 앞서 말한 지금 시점의 사회에서 필연적으로 도출될 수 있는 가치이다. 왜 쿨함이 지금 도출되었는가를 이해하는 것은 따라서 간단하다. 그러나 이 필연성이 쿨함이 적확한 가치임을 증거하는 것은 아니다. 앞서 말했듯 쿨함은 지금 시점의 사회에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가는 대인관계와, 비율적으로 격감하는 ‘진지한 인간관계’간의 부조화 속에서 야기된, 새로이 제시된 가치 체계라 할 수 있다. 감당할 수 없으면 가볍게, 이해하지 못하면 즐기며, 라는 말로 대변할 수 있는 쿨함은, 달리 분석하면 인간관계에 대한 진지성의 상실로 받아들일 수 있다. 또는, 모든 것에 익숙해져 있다면서 모든 것에 미숙할 뿐인 현대인의 자화상으로. 따라서 쿨하다는 평가는, 대부분의 경우 인간관계에 훈련이 덜 되어 미숙하고, 진지하지 않다는 평가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쿨함 자체는 필연적으로 야기된 항목일지언정, 쿨함을 받아들여서는 안 될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쿨하다는 것은 앞서 말했듯 책임을 회피하려는 의식에서 출발한다. 대인 관계에서 받을 상처를 줄이기 위해, 애초에 관계에 대한 책임 자체를 회피한다. 관계가 가벼워진다거나, 혹은 진지성이 상실된다는 것은 따라서 책임 회피에서 야기된 부차적인 것에 불과하다. 어떻게 쿨할 수 있느냐는 방법론적인 고민을 하는, 쿨함을 추구하는 이들의 심리에 내재된 의식은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관계성에서 회피한 책임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중요하다. 그 책임은 관계의 맞은편에 있는, 쿨하지 못한 상대에게로 전이된다. 쿨한 덕목을 함양하지 못한 이는 아직도 관계에서 오는 책임을 그대로 걸머져야 하며, 쿨한 상대방이 그야말로 ‘쿨하게’ 던진 한 마디에 쿨하지 못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소심한 녀석, 이라는 평가가 공략하는 지점도 이 곳이다. 진지성. 진지하게 매사를 반응하는 이는 따라서 ‘쿨하다’고 규정짓지 않았을 뿐이지 실제로는 쿨한 인간들 사이에 있을 때 어쩔 수 없이 소심해 진다. 일부 개인이 쿨하게 되면, 그로서 면책된 책임은 곧 소심한 인간에게로 전이된다. 따라서 쿨함은 책임을 증발시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전이시키는 것에 불과하다.
문제는, 쿨하다는 평가는 자신이 스스로에게 내리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쿨하고자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지만, ‘쿨함’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정립된 것은 다만 최근의 일일 따름이다. ‘소심하다’는 표현 자체가 사용된 것은 그 보다 이전이고, 관계를 가볍게 유지하려는 이들이 문제로 대두된 것은 보다 이전의 일이다. 쿨함이라는 키워드로 도출된 것이 최근일 따름이다. 언제나 ‘쿨하다’ 혹은 ‘가볍다’는 표현은 타인이 내리는 평가일 따름이었다. 따라서 ‘넌 쿨해’라는 평가에서 누구도 자유롭지 못하다. 쿨함이라는 단어에는 부정적 가치와 필연성이 혼재되어 있다. 쿨함을 증오하거나 추구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지만, 평가는 타인의 자유이다. 쿨함에 부정적 평가가 내재되어 있는 이상, 그리고 쿨함이 필연적인 결과인 이상 우리에게 쿨하다는 비판을 피할 자유는 없다. 모든 관계에 진지하지 못한 다음에는 언제라도 ‘넌 쿨해’라는 말을 들을 수밖에 없다. 정리하자. 쿨하고 싶어 하는 이들은, 실제로는 인간관계에 미숙하고, 상처받기를 두려워하며, 책임을 피하고 싶고, 그 책임이 다른 이에게 달라붙을 뿐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이들이다. 바로 당신이 언제고 누군가에게 이런 사람일 수 있다는 것이다.
쿨함을, 애초에 언급하는 자체가 부당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넌 쿨해’ 쿨하다는 것을 규정하고 분석하는 행위는 쿨함의 논의를 확대 재생산하는 것에 불과하다. 쿨함은 부정적인 가치인 동시에 필연적으로 야기된 가치이다. 쿨하고 싶다, 혹은 쿨해선 안된다고 말하는 것은 오직 보다 쿨한 사람을 양산하는 계기가 될 뿐이다. 쿨함이 부정적인 이유를 아는 이는, 관계에서 진지함이 결여된 상대방을 쿨하다고 비판한다. 쿨함이 필연적인 이유를 아는 이는 자신의 부당한 가벼움을 필연성에 힘입어 무마하려 시도할 것이다. 어느 쪽이건 무게있는 진지한 관계를 영위하려는 노력을 저해한다. 유일한 해법은 말하지 않고, 언제나 진지하려 노력하는 것뿐이다. 미숙함을 경험과 훈련으로 숙달시켜 스스로를 단련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모두가 그럴 수는 없고, 그렇다고 모두가 쿨해서도 안된다는 것이 문제다. 확실한 것은, 지금 당신은 쿨함을 노래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우선 거기서 출발해야한다는 것, 그뿐이다. 쿨함을 노래하는 것은 문제의 원인을 증발시킨다.
[전략]........대부분의 경우 쿨한 쪽과 쿨하지 않은 쪽이 대화를 하다보면 쿨하지 않은 쪽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찌질이’가 된 기분을 지우기 어려운 것이다. 자신만이 속 좁고 못나 보이기 마련. 그래서 간간이 찾아오는 그런 경험들로 인하여 사람들은 평균적으로 쿨해지기 마련이다. 마치 그것은 신종 페스트와 같이 순식간에 퍼져나가, 어느새 지금은 사회의 트렌드로 자리잡아 버리게 된 것이다. 어느 안방 드라마 오프닝 송에 나와도 의아스럽지 않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또, 사람과 사람이 만나던 방식 중 의외성에 기반한 것이 많아졌다는 사실도 한 가지 이유가 될 수 있겠다. 사람들은 일회성 만남에 익숙해졌으며, 그런 만남을 주선할 수 있는 장소도 예전에 비해서 많아졌다. 일단 일회성 만남 자체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졌기 때문에 길거리를 지나는 사람들 중 마음에 드는 누구에라도 접근하기가 용이해진 것이다..............[중략]
그렇게 현대사회는 가볍고 쉽다. 충분히 쿨할만큼 쿨해졌다고 생각한다. 만남도, 사랑도, 섹스도, 이별조차 쉽다. 사람들은 말한다. 이별이 쿨해야 한다는 것은 구차하게 서로 눈물 쏟으며 질질 끌지 않는 것, 깔끔하고 뒤끝없는 완벽한 감정 정리를 통해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그 길 위에서도 다른 누군가를 유혹할 수 있을 정도의 마음가짐이라고. 이틀 후 마주친, 서로 다른 커플 - 나와 전 애인 - 의 어색할 법한 상황에서도 안녕, 하고 생긋 웃으며 손 흔들어줄 수 있어야 한다고.
하지만 그런 이야기들을 들을 때 마다 나는 매번 가슴팍을 세게 한 번 차인 기분을 버릴 수 없다. 그럴거면 연애를 하는 목적, 아니 더 거슬러 올라가서 사람을 만나는 목적이 대체 무어란 말인가......... [후략]
"쿨함에 대하여" 병장 이준영, 05. 11. 16. 중 발췌
“내가 요즘 애들 같게, 그리고 너처럼 쿨하지 못해서 미안한데, 그래도 난 네가 이해가 안돼.”
3년 가까이를 사귀었던 그 녀석과 어느 날, 나는 정말 심하게 싸웠다. 잘 아는 여자 후배 아이를 내가 혼자 사는 자취방에 하룻밤을 재웠고, 글자 그대로 수면만 취하고 (난 그 옆에서 게임하며 밤을 지새웠다. 엠파이어어스라는, 게임이 너무 재밌어서 난 그 후배에게 뭔가 수작을 걸 생각 따위를 할 틈조차 없었다) 아침에 밥을 지어 먹인 후 돌려보냈다는 사실을 그 녀석이 알게 된 직후였다. 난 태어나서 처음으로 쿨하다는 말을 들었고, 그 이후로도 쿨하다는 평을 다시 들은 적은 없었다. 그러나 그 녀석은 헤어질 때까지 계속, 나를 쿨한 성격의 소유자로 생각했던 것 같다. 쿨함을 추구하는 사회 담론을 그토록 증오했기 때문에 막상 내가 그 평가를 받고 나선 한동안 죄책감에 꽤나 시달렸던 것 같다.
문제는 내가 항상 쿨한 이들을 증오했다는 것에서 시작한다. 쿨하다는, 관계의 피상성을 전제로 한 새로운 인간관계의 전형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힘들었기 때문이다. 쿨하다는 것은 관계의 시작과 단절에서 질질 끌거나 매달리지 않고 시원하게, 깔끔하게 끝맺음한다는 것을 말한다. 시원하게, 헤어지는 애인을 잡지도 않고 깔끔하게, 약속을 이리저리 잡고서 쩔쩔 매지도 않는다. 지켜보는 제 3자의 입장에서 보면 지저분해 보일 면도 없고 모든 관계가 매끄러울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애정을 품은 대상과의 관계를 쉽게 포기할 수 있는가? 애정은 속박이고, 애정하는 자의 마음에 미련을 남기기 마련이다. 쿨하다는 것은 따라서 인간관계에서 책임지지 않겠다는 심리를 기저에 깔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질퍽한 관계성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결국 침몰해버리는 이들을 비웃고, 인간관계의 늪을 우회해 걷는 것을 우리는 쿨하다 말한다.
따라서 외로움을 기피하는, 정이 전제된 인간관계를 원하는 이들은 쿨하다는 표현을 싫어한다. 인간관계에 정이 바탕으로 작용하기 위해선 자신이 맺고 있는 관계에 책임을 지려는 태도가 필요하다. 책임은, 적확하게 대응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아파하고 슬퍼할 감정적 변화로 대체로 갈음할 수 있다. 쿨하다는 것은 이같은 책임을 두려워하는, 책임을 기피하려는 태도를 말한다. 쿨하게, 책임지지 않는 태도. 보통 부정적인 의미로 쿨함을 칭할 때 그 단어에 내포된 의미는 대략 이러하다.
쿨함을 책임의 면피를 도모하는 심리적 상태로 규명했을 경우, 당연하게도 왜 쿨함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이들은 겉보기에 시원해 보이는 그 관계 자체를 선호하는 것이다. 현대의, 숱하게 다양한 사람을 만날 기회와 헤어질 기회를 통해 빈번해지는 이별에서 고통 받기를 원하지 않는 것이다. 너무 다양하게 만난 사람 중 단지 한 명이었을 뿐이므로, 이별에 슬픔을 느낄 정도로 정이 들지 않은 사람이지만, 그러나 이별시 소원하게 헤어지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은 기존의 윤리관에 비추어 바르지 않다. 따라서 그리 가깝지는 않던 지인을 떠나보내는 사람은 당혹스럽다. 혹은, 숱한 사람을 만나지만 그 속에서 정을 나눌 정도로 깊은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은데, 그 많지 않은 한 사람과 이별해야할 경우의 슬픔을, 우리는 평소 숱하게 해왔던 이별에서 단련시킬 수 없다. 따라서 친밀하던 사람을 떠나보내는 것은 너무 감당하기 힘든 고통일 수 있다. 쿨하다면, 그러지 않을 수 있다. 관계성 자체에 쿨함이 전제되기 시작하면 깊이 있는 관계의 단절에서 슬퍼하지 않을 수 있고, 쉬운 관계를 또한 쉽사리 밝게 웃으며 끝맺음 할 수 있다. 전혀 상반되는 두가지 경우에 모두, 쿨함은 새로운 덕목으로 제시되어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쿨함이라는 가치는 현대 사회의 한 부분으로 편입될 수밖에 없다. 우리에게 주어진 유한한 시간에 비해 지나치게 방대한 만남의 기회가 주어진, 현대에서는. 다만 표면으로, 21세기가 되어서야 쿨함이 표면 위로 도출된 이유는 다름 아닌 인터넷과, 자유가 본격화된 90년대 초반에 청춘을 보냈던 이들이 20대 후반에 들어섰기 때문이라 보인다.
그러므로 쿨함은 일종의 방어기제로 해석할 수 있다. 단절에서 상처받기 싫다는 심리에서 시작해 관계 자체에 내재된 무게를 제거하는 것으로, 쿨함을 읽을 수 있다. 혹은 우마차와 서편으로 대변되는 이전 시대의 인간관계의 특징에서 성립한 덕목을 인터넷과 자동차로 대변되는 현대 사회의 특징에 입각한 것으로 교체해 가는 과정으로도 또한 읽을 수 있다. 사회 저변이 변화하면 의식도 변화해야하며 그 기간에 진통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우리가 모두 쿨해야 하는가? 분명 쿨한 사람은 존재한다. 가볍게 언제나 즐겁게 일상을 대하고 타인을 대면하는 이들을 우리는 드물지 않게 주변에서 목격할 수 있다. 그들과의 대화는 기분 나쁘지 않고, 그들도 가볍게, 나를 대하기에 기분 나쁠 일도 없다. 그러나 그들의 존재가 우리가 쿨함을 추구해야하는가, 혹은 용인해야하는가의 여부를 결정짓는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쿨한 성격을 갖고 있는 이들의 존재는 개인적인 문제일 따름이다. 여기서 논의되어야할 것은 왜 쿨함이고, 어떻게 쿨해야 하는가라는 사회적인 분석이다.
앞서도 말했듯이 나는 쿨함이라는 평가를 싫어한다. 쿨함은 책임을 전제하지 않음을 뜻하고, 이는 앞서 말한 지금 시점의 사회에서 필연적으로 도출될 수 있는 가치이다. 왜 쿨함이 지금 도출되었는가를 이해하는 것은 따라서 간단하다. 그러나 이 필연성이 쿨함이 적확한 가치임을 증거하는 것은 아니다. 앞서 말했듯 쿨함은 지금 시점의 사회에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가는 대인관계와, 비율적으로 격감하는 ‘진지한 인간관계’간의 부조화 속에서 야기된, 새로이 제시된 가치 체계라 할 수 있다. 감당할 수 없으면 가볍게, 이해하지 못하면 즐기며, 라는 말로 대변할 수 있는 쿨함은, 달리 분석하면 인간관계에 대한 진지성의 상실로 받아들일 수 있다. 또는, 모든 것에 익숙해져 있다면서 모든 것에 미숙할 뿐인 현대인의 자화상으로. 따라서 쿨하다는 평가는, 대부분의 경우 인간관계에 훈련이 덜 되어 미숙하고, 진지하지 않다는 평가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쿨함 자체는 필연적으로 야기된 항목일지언정, 쿨함을 받아들여서는 안 될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쿨하다는 것은 앞서 말했듯 책임을 회피하려는 의식에서 출발한다. 대인 관계에서 받을 상처를 줄이기 위해, 애초에 관계에 대한 책임 자체를 회피한다. 관계가 가벼워진다거나, 혹은 진지성이 상실된다는 것은 따라서 책임 회피에서 야기된 부차적인 것에 불과하다. 어떻게 쿨할 수 있느냐는 방법론적인 고민을 하는, 쿨함을 추구하는 이들의 심리에 내재된 의식은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관계성에서 회피한 책임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중요하다. 그 책임은 관계의 맞은편에 있는, 쿨하지 못한 상대에게로 전이된다. 쿨한 덕목을 함양하지 못한 이는 아직도 관계에서 오는 책임을 그대로 걸머져야 하며, 쿨한 상대방이 그야말로 ‘쿨하게’ 던진 한 마디에 쿨하지 못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소심한 녀석, 이라는 평가가 공략하는 지점도 이 곳이다. 진지성. 진지하게 매사를 반응하는 이는 따라서 ‘쿨하다’고 규정짓지 않았을 뿐이지 실제로는 쿨한 인간들 사이에 있을 때 어쩔 수 없이 소심해 진다. 일부 개인이 쿨하게 되면, 그로서 면책된 책임은 곧 소심한 인간에게로 전이된다. 따라서 쿨함은 책임을 증발시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전이시키는 것에 불과하다.
문제는, 쿨하다는 평가는 자신이 스스로에게 내리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쿨하고자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지만, ‘쿨함’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정립된 것은 다만 최근의 일일 따름이다. ‘소심하다’는 표현 자체가 사용된 것은 그 보다 이전이고, 관계를 가볍게 유지하려는 이들이 문제로 대두된 것은 보다 이전의 일이다. 쿨함이라는 키워드로 도출된 것이 최근일 따름이다. 언제나 ‘쿨하다’ 혹은 ‘가볍다’는 표현은 타인이 내리는 평가일 따름이었다. 따라서 ‘넌 쿨해’라는 평가에서 누구도 자유롭지 못하다. 쿨함이라는 단어에는 부정적 가치와 필연성이 혼재되어 있다. 쿨함을 증오하거나 추구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지만, 평가는 타인의 자유이다. 쿨함에 부정적 평가가 내재되어 있는 이상, 그리고 쿨함이 필연적인 결과인 이상 우리에게 쿨하다는 비판을 피할 자유는 없다. 모든 관계에 진지하지 못한 다음에는 언제라도 ‘넌 쿨해’라는 말을 들을 수밖에 없다. 정리하자. 쿨하고 싶어 하는 이들은, 실제로는 인간관계에 미숙하고, 상처받기를 두려워하며, 책임을 피하고 싶고, 그 책임이 다른 이에게 달라붙을 뿐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이들이다. 바로 당신이 언제고 누군가에게 이런 사람일 수 있다는 것이다.
쿨함을, 애초에 언급하는 자체가 부당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넌 쿨해’ 쿨하다는 것을 규정하고 분석하는 행위는 쿨함의 논의를 확대 재생산하는 것에 불과하다. 쿨함은 부정적인 가치인 동시에 필연적으로 야기된 가치이다. 쿨하고 싶다, 혹은 쿨해선 안된다고 말하는 것은 오직 보다 쿨한 사람을 양산하는 계기가 될 뿐이다. 쿨함이 부정적인 이유를 아는 이는, 관계에서 진지함이 결여된 상대방을 쿨하다고 비판한다. 쿨함이 필연적인 이유를 아는 이는 자신의 부당한 가벼움을 필연성에 힘입어 무마하려 시도할 것이다. 어느 쪽이건 무게있는 진지한 관계를 영위하려는 노력을 저해한다. 유일한 해법은 말하지 않고, 언제나 진지하려 노력하는 것뿐이다. 미숙함을 경험과 훈련으로 숙달시켜 스스로를 단련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모두가 그럴 수는 없고, 그렇다고 모두가 쿨해서도 안된다는 것이 문제다. 확실한 것은, 지금 당신은 쿨함을 노래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우선 거기서 출발해야한다는 것, 그뿐이다. 쿨함을 노래하는 것은 문제의 원인을 증발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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