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에 대한 고찰
by 세로토닌 | 2006년 12월 11일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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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에 대한 고찰 | 시대유감 2005/07/17 03:23
http://blog.naver.com/minajin/120015319448
우리는 어릴 때부터 학교나 집, 여러 곳에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주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배운다.
사람들이 사회를 이루면서 살면서 자신이 피해입지 않으려면 다른 이에게 피해를 주지 말아야 한다는 황금률. 그러나, 우리는 가끔 살면서 특정한 타인은 배제시키는 때가 있다.
바로 우리 안의 또다른 자신인 '미래의 나'를.
조금 황당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지금 여기 있는 우리 자신과, 과거에 있었던 우리 자신과, 미래에 있을 우리 자신 이 셋은 모두 다른 사람이다. 이걸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우리는 같은 공간에 있지는 못하지만 우리는 전부 다른 생각과 , 다른 사고방식과, 다른 모습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시시각각 변화한다. 조금씩 내가 아는 것은 많아지고, 잊는 것도 많아진다. 지금 아는 것을 그 때는 몰랐을 수도 있고, 내년에는 잊어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지금은 이렇게 살지만, 개과천선하기 전에는 망나니로 살고 있었거나, 내후년이나 한 10년쯤 후에는 충격과 공포에 시달리면서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과격한 예들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우리가 알게 모르게 조금씩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우리 안의 과거, 현재 미래 이 셋은 닮았으면서도 다른, 세쌍둥이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 세쌍둥이들의 '의지'는 어떨까? 우리의 의지가 미칠 수 있는 범위는 꽤나 시간적인 면에서 제한되어 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와 그에 따르는 가까운 미래. 우리는 지금 끓고 있는 주전자의 불을 끄고 커피를 타서 마실 수도 있고, 가스 밸브를 잠가서 혹시 모르는 나중의 가스 사고를 예방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과거로 돌아가서 했던 말을 다시 입에 주워 담을 수는 없는 일이며, 지금 이 자리에서 2050년의 첨단 과학시대에서 니카라과가 쏘아올리는 군사위성을 폭파하는 일도 불가능하다.(파이트 클럽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그러면 다시 타인에 대한 피해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타인보다, 우리 자신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꺼내는 편이 좋겠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의지대로 무언가를 할 수 없을 때, 우리는 안타까움과 괴로움 또는 분노의 부정적인 감정들을 느낀다. 그것이 만약 어쩔 수 없는 자연물이 아니라 타인의 고의나 과실로 인한 일이라 책임을 물 수 있다면, 우리는 그에게 가서 꼬인 일을 풀 수 있도록 타협을 제안하거나, 먹히지 않으면 싸움으로 번지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가끔 우리는 책임을 알면서도 그것을 추궁할 수 없는 상대를 만나 혼란에 빠진다. 그것은 종종 과거의 우리 자신이다. 우리는 실체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향해 분노를 표출하고, 이것을 후회라고 부른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과거의 자신과 미래의 우리는 서로 관계를 맺고 있지만 의지력을 행사하는 일이 제한되어 있다는 점에서 상당히 특수한 관계라고 할 수 있다. 과거의 자신은 미래에까지 그가 행한 일의 영향을 미치지만, 미래의 자신은 그 영향에 대해서 아무런 손도 쓸 수 없는 일이다. 아무리 화를 내고 소리를 쳐 봐도 우리 자신이 저질러 놓은 일들에 대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자책과 뒤늦은 마무리 뿐이다.
미래의 자신에게 미안한 사람이 되지 말자. 과거의 자신을 부끄러워하지도 말자. 물론 사람이 완벽할 수는 없겠지만,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끊임없는 노력과 그걸 실천할 수 있는 용기이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하는 일을 한다면, 미래에서 우리의 웃는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을까.
http://blog.naver.com/minajin/120015319448
우리는 어릴 때부터 학교나 집, 여러 곳에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주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배운다.
사람들이 사회를 이루면서 살면서 자신이 피해입지 않으려면 다른 이에게 피해를 주지 말아야 한다는 황금률. 그러나, 우리는 가끔 살면서 특정한 타인은 배제시키는 때가 있다.
바로 우리 안의 또다른 자신인 '미래의 나'를.
조금 황당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지금 여기 있는 우리 자신과, 과거에 있었던 우리 자신과, 미래에 있을 우리 자신 이 셋은 모두 다른 사람이다. 이걸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우리는 같은 공간에 있지는 못하지만 우리는 전부 다른 생각과 , 다른 사고방식과, 다른 모습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시시각각 변화한다. 조금씩 내가 아는 것은 많아지고, 잊는 것도 많아진다. 지금 아는 것을 그 때는 몰랐을 수도 있고, 내년에는 잊어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지금은 이렇게 살지만, 개과천선하기 전에는 망나니로 살고 있었거나, 내후년이나 한 10년쯤 후에는 충격과 공포에 시달리면서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과격한 예들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우리가 알게 모르게 조금씩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우리 안의 과거, 현재 미래 이 셋은 닮았으면서도 다른, 세쌍둥이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 세쌍둥이들의 '의지'는 어떨까? 우리의 의지가 미칠 수 있는 범위는 꽤나 시간적인 면에서 제한되어 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와 그에 따르는 가까운 미래. 우리는 지금 끓고 있는 주전자의 불을 끄고 커피를 타서 마실 수도 있고, 가스 밸브를 잠가서 혹시 모르는 나중의 가스 사고를 예방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과거로 돌아가서 했던 말을 다시 입에 주워 담을 수는 없는 일이며, 지금 이 자리에서 2050년의 첨단 과학시대에서 니카라과가 쏘아올리는 군사위성을 폭파하는 일도 불가능하다.(파이트 클럽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그러면 다시 타인에 대한 피해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타인보다, 우리 자신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꺼내는 편이 좋겠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의지대로 무언가를 할 수 없을 때, 우리는 안타까움과 괴로움 또는 분노의 부정적인 감정들을 느낀다. 그것이 만약 어쩔 수 없는 자연물이 아니라 타인의 고의나 과실로 인한 일이라 책임을 물 수 있다면, 우리는 그에게 가서 꼬인 일을 풀 수 있도록 타협을 제안하거나, 먹히지 않으면 싸움으로 번지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가끔 우리는 책임을 알면서도 그것을 추궁할 수 없는 상대를 만나 혼란에 빠진다. 그것은 종종 과거의 우리 자신이다. 우리는 실체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향해 분노를 표출하고, 이것을 후회라고 부른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과거의 자신과 미래의 우리는 서로 관계를 맺고 있지만 의지력을 행사하는 일이 제한되어 있다는 점에서 상당히 특수한 관계라고 할 수 있다. 과거의 자신은 미래에까지 그가 행한 일의 영향을 미치지만, 미래의 자신은 그 영향에 대해서 아무런 손도 쓸 수 없는 일이다. 아무리 화를 내고 소리를 쳐 봐도 우리 자신이 저질러 놓은 일들에 대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자책과 뒤늦은 마무리 뿐이다.
미래의 자신에게 미안한 사람이 되지 말자. 과거의 자신을 부끄러워하지도 말자. 물론 사람이 완벽할 수는 없겠지만,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끊임없는 노력과 그걸 실천할 수 있는 용기이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하는 일을 한다면, 미래에서 우리의 웃는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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